'부여'라는 이름은 한국사에 등장하는 부여에서 나온 것이 맞다. 이 지역은 부여라는 나라가 실존했던 위치와 전혀 무관하지만 과거 백제는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족에서 나왔고, 성씨도 부여씨였다. 한때는 백제 성왕이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꿨을 정도로 부여 계승의식을 가졌으며 그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가 이곳이었기에 이후 지명이 부여가 되었다. 공주시(백제 때의 웅진)와 함께 백제문화제를 개회식과 폐막식을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이용우 당시 군수의 노력으로 공주와 합쳐져서 세계대백제전을 진행하였다.
기원전에는 청동기시대의 송국리 문화유형의 발원지였고, 그 이후 기원전 4~3세기 때 고조선이 전국연에게 밀려나갈 때 발생한 이주민들의 한반도 이주 러시 후에는 삼한 중 마한 고포국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인 그 이후 대강 4세기 즈음 백제분서왕 혹은 비류왕 시기에 같은 마한의 백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소부리(所夫里), 소우리, 사비 등의 지명으로 불렸고, 공식적으로는 사비성이 된다. 고구려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개로왕이 죽고 한성백제가 몰락한 뒤 웅진백제시대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쯤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5세기 말인 동성왕 시기부터 왕이 자주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부터 정치적 중요성이 수도 웅진성(현 충청남도공주시) 다음으로 큰 도시가 아니었나 추측하거나 혹은 동성왕대부터 의도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도시일 것이라 추측된다.[3]
이러한 점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과 매우 흡사하다. 평양 역시 313년 미천왕의 수복 이후 고구려령으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시기 이전부터 제2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소도 평양이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기사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평양 역시 427년 장수왕의 천도 이전부터 완성되어있던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
백제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538년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래로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6대 122년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결국 부여가 도시개발이 안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말았다.[4]
이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도 마찬가지이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해 궁성을 비롯한 많은 문물이 소실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한 백제인이 금동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는 중심지는 사비군(泗沘郡)으로, 현 임천면 일대는 가림군(加林郡)으로 불린다. 사비군의 속현으로는 진악산현(珍惡山縣, 석성면)과 열기현(悅己縣, 충청남도청양군 정산면)이 있었고 가림군의 속현으로는 마산현(馬山縣,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과 대산현(大山縣, 홍산면)이 있었다.[5]
남북국시대의 행정구역은 보통 삼국시대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여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인다.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정책 때 사비군은 부여군(扶餘郡)으로, 가림군은 가림군(嘉林郡)[6]
한자만 다르다.
으로 개칭됐고 그 아래로 진악산현은 석산현(石山縣)으로, 열기현은 열성현(悅城縣)으로, 마산현은 그대로, 대산현은 한산현(翰山縣)이 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일본이 '내선일체'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일환으로 부여 부소산 일대(지금의 삼충사 위치)에 관폐대사 부여신궁을 건축하고자 공사를 시작하였다. 진구 황후를 비롯하여 백제와 관계 있는 일본의 옛 천황들의 신령 4위를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물을 완공되기 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광복하자, 만들다 만 부여신궁 건물을 부여청년동맹원들이 파괴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부여신궁을 세우는데 너무 시골이라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아예 부여를 신도(神都)라 칭하며 대대적으로 도시화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여 내의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그 영향이 지금도 남아있다.[7]
부여읍 초입 로터리부터 군청 앞까지의 도로가 당시 일제가 닦은 신작로.
그 몇해 전 충남도청 이전에 든 비용이 당시 돈으로 16만 원이었는데, 부여신궁의 총 공사비는 24만 원이었다. 더군다나 히로히토 천황이 직접 공사 계획을 발표했다('충청남도 인터넷 신문' 인용).
당시 신궁에 모시려던 이가 임나일본부설에도 나오는 진구 황후 등이었던 점과 부여가 고대 일본과 관계가 깊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란 점 등을 드는 얘기가 있다. 부여신궁을 개발하면서 이 일대의 도로나 도시 정비 계획까지 잡혀있었으니 이때 개발이 진척되었더라면 금세 '부여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 료타로의 '한나라(한국) 기행'에서, '일제가 망한 건 좋은데, 부여 일대 개발때까지는 버텼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의 인터뷰가 소개된다.[8]
물론 친일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부여가 개발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나온 대화.
실제로 현재 부여군은 발전 상태에 비해서 읍내의 도로 정비가 잘 된 편이다. 도로정비까지 가다가 일본이 패망해서 그만... 그러나 만약 일제로 인해 부여가 개발되었다면 지금까지도 일본 극우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며 프로파간다로 써먹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또한 서울의 풍납토성처럼 사비시기의 백제의 유적을 발굴하는 일에 있어 지금 이상의 애로사항이 꽃필것은 확정이다.
1960~1970년대까지 금강 내륙수운이 원활히 돌아갈 때 인근의 강경과 더불어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부여에는 꽤 오랫동안 철도는 물론이거니와 고속도로도 없었던 데다, 1960년대~1990년대에 이루어진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해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충청 내륙 지역들과 달리 부여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 지역들은 인구 유출을 겪게 되었으며, 1990년 금강하구둑의 완공으로 금강 내륙수운이 완전히 정지됨에 따라 부여의 발전 역시 정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군의 인구도 계속하여 감소하는 추세이다. 물론 강경만큼은 아니다.
철도는 없다. 원래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0년대에 충남선 건설 계획으로 논산에서 부여까지 연결될 예정이었던 철도 부설 계획이 존재했었다. 논산역에서 부여읍까지 택시요금은 약 2만원 + a(시외할증), 25~30분이 소요된다. 그러니 논산역에서 논산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부여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는게 좋다. 배차도 많으며, 훨씬 더 싸다. 그 외에는 부여여객의 일부 농어촌버스가 논산시나 논산역까지 운행한다.
보령선 착공이 확정되면서 부여, 청양, 공주를 경유해서 간다. 그러나 2021년 현재까지 나오고있는 이야기가 없는걸로 봐서는 무산될 가능성이 매우높다.
2000년대 초에 들어서야 롯데리아가 들어올 만큼 열악한 곳이었다. 레스토랑의 경우 브랜드 레스토랑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대부분이 개인이 운영하는 경양식 레스토랑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2010년대가 되어 한스델리가 시내에 입점하였고 최근에는 라라코스트가 입점하게 되었다. 시내에서 거리는 멀지만 규암면에 있는 롯데아울렛에 풀잎채 등 뷔페식 샐러드바가 생겼다.
분식집 같은 경우도 바로 그 집 역시 2000년 초반에 생겼으며, 그 전까지 이름 있는 분식집은 신포우리만두 정도였다. 편의점은 1996~1997년도 경에 들어왔는데, 역시나 브랜드 편의점은 아니었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도 역시 2000년 초반에 들어왔다.
그러나 반드시 프랜차이즈가 들어와 있는 것이 그 도시의 면모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부여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엔 웬만한 업종의 상점, 요식점이 들어서 있으며 이러한 곳에서 판매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은 프랜차이즈와 견줄만 하다. 그리고 도시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수준이지만 인지도 높은 프렌차이즈 카페가 있고 오랜 전통도시답게 한옥 스타일로 지어졌거나 한옥을 콘셉트으로 잡은 커피숍이 많은 편이다.
이런 소도시지만, 그래도 영화관이 2개나 있는데, 한 곳은 전통시장 쪽에, 다른 한 곳은 궁남사거리 인근 계백로에 위치하고 있다. 버스터미널과 전통시장 인근에 위치한 금성시네마는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지하주차장이 있으며, 2관까지 있고 1층은 은행이다. 덕분에 영화를 개봉하면 기간 동안 2개 또는 3개나 4개의 작품만을 상영한다. 현재는 만화방과 같이 운영중. 스타박스의 경우 잘 정비된 대로변에 위치해 차를 이용해 가기가 좋고, 인근에 학교와 관공서들이 분포해 있다. 술집 같은 경우는 딱히 밀집지역 같은 게 없다. 대부분이 동네 술집. 술자리 게임 같은 거 하기도 힘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음식점 같은 경우는 의외로 괜찮은 편. 처음부터 관광도시여서인지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몇몇 유명한 음식점들이 포진해 있다. 부소산이나 구드래공원 주변에 밀집되어 있는 관광지 식당은 말 그대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다 보니 부실한 식사를 하게 될 확률이 높다. [12]
롯데아울렛을 유치하기 위해 부지 땅값을 무료로 해줬다는 카더라가 있다. 꽤 많은 브랜드가 입점하였다. 이제 유명 브랜드를 사러 타지로 나가지 않게 된 일반 시민들은 환영했고, 부여읍 내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반대 운동도 벌였었지만 오픈 8년째인 현재도 매우 성업 중이다.[14]
전라북도와 가까운 탓에 전라도와 충청도가 혼합해 있는 듯한 음식들이 대부분. 대표적으로는 구드래 돌쌈밥이라는 곳이 있는데 구드래에 위치하고 20년이 넘게 성업 중이다. 돌솥밥에 여러가지 쌈들이 같이 나오는데 반찬이 많지만 대부분 구색 갖추기 수준. 이외에도 구드래 쪽에 역시 장원막국수라는 막국수집이 있는데, 편육을 시키면 나오는 막국수가 아니라 물막국수로 냉면과 비슷하다. 여름에 가면 자리가 없을 지경. 현지인들이 찾는 숨겨진 막국수 맛집은 은산면에 위치한 시골막국수라는 곳인데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가 있다. 냉면의 경우는 구드래 입구 쪽에 함흥냉면이 유명하다. 다만 가서 말을 하지 않으면 물 대신 육수를 주기 때문에 물은 따로 달라고 할 것. 부소산 입구 쪽에 있는 고참반점(현 고참밀가)이라는 중국집은 약 6월부터 9월까지만 장사를 하는 곳으로 콩국수와 짜장면, 만두만을 판다. 물론 사람들은 대부분 콩국수를 먹으러 온다.
중국집의 경우는 부여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만다린이라는 중국집이 가장 오래되고 성업 중이며 구드래에 위치한 상하이도 가볼만하다. 짬뽕은 상운반점이 가장 인기가 많다. 분식집으로는 진미당이라는 집이 있는데 특이한 건 넣지 않은 평범하고 깔끔한 칼국수와 손으로 빚은 만두가 일품이다. 매우 훌륭한 퀄리티의 군만두를 맛볼 수 있다.
읍내 전통시장에 시골통닭은 경우, 과거부터 치킨이 아닌 통닭과 삼계탕을 팔던 곳이었는데, 백종원의 삼대천왕에 나온 이후로 부여를 방문하게 되면 오게 되는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지역 특성상 바로 아래 전라북도익산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익산 쪽에서 유입되어 오던 사람들이 있다. 먼 과거 부여와 익산이 백제 중후기의 핵심 지역인 데다, 가까운 과거 경제 발전기에는 충남에서 가장 발전한 동네였던 강경과 맞붙어 있어서 전북에서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어있다. 실제로도 충청도 사투리에 약간의 전북 사투리가 섞여서, 구분하기 어려운 사투리를 쓰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인 '거시기'의 사용은 드물고 '시방'을 자주 쓴다. 이는 논산 및 서천 등지도 똑같다. (논산시 반절 정도는 원래 전라북도에 속해있다가 충청남도로 부속되었다.)
1967년에는 농민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이 곳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올림픽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냥 충남 지역의 16개 면에서 온 농민들이 선수로 참가해 심플하게 하루 만에 끝낸 행사였다. 농촌의 번영을 위한 취지로 열렸으며 종목으로는 손수레 빨리 끌기, 쟁기질 빨리 하기, 감자 빨리 까기, 경운기 빨리 몰기 등 농촌 생활을 스포츠화한 종목들이 있었다. 우승 상품으로는 비료가 주어졌으며 대회가 폐막된 후에는 참가상격으로 술과 음식을 나눠주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 올림픽은 1회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대한뉴스 중 농민 올림픽
부여가 낳은 가장 유명한 정치인은 단연 김종필(JP)이다. 과거 1990년대 후반까지는 JP를 위시한 지역정당 텃밭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린 적도 있으며, JP가 이곳에서 81%의 득표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16대 대선까지도 JP의 영형력은 절대적이었는데, JP가 이회창 지지 선언을 거부하자 이회창 후보가 32%대의 저조한 득표율에 머무르면서 노무현 후보가 충청남도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으며 승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JP가 17대 총선에서 국회입성에 실패해 은퇴한 이후[18]
이 때 JP는 지역구 선거구가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비례대표 1번으로 나왔음에도 정당 득표율 3%도 못 받은 채 낙선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 충격받은 JP는 그대로 정계 은퇴한다. 여담으로 이 때 JP가 당선되었다면 9선으로 동률이었던 YS를 제치고 한국 국회 역사상 최다선인 10선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영향력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지역정당 계보를 이어받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에서 출마한 이진삼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 공천에서 떨어졌고, 새누리당 김근태 후보가 당선되나 얼마 못 가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된다. 그리고 2013년에 실시된 재보선에 전직 충남지사 이완구가 출마해 화제가 되었고 80%에 가까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6년 20대 국회 선거구 조정 당시 적정 인구(14만)에 도달하지 못하여 이웃 선거구인 공주시와 통합되었다. 그리고 20대 총선에선 공주 출신의 JP키즈인 정진석이 당선되었다.
군수 역시 지역정당이 압도적이었지만, 민선 4기 지방선거에서는 현직 군수가 자민련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공천받아 당선된 적이 있다. 지역정당이 몰락한 이후의 6기 지방선거에는 농촌답게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가, 7기 지방선거에서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사실 민주당 후보였던 박정현이 부여군수로 당선된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20대 총선에서 정진석에게 낙선했지만 나름 유의미한 득표를 얻었던 박수현이 부여에 직접 내려가서 물심양면으로 박정현을 돕는 동시에 부여 노인들을 상대로 맞춤형 유세를 펼친것이 큰 효과를 봤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현직 군수였던 이용우와 충남도의원이었던 강용일 예비후보가 군수 후보 경선때 고소드립까지 남발해가며 심각할 정도의 네거티브를 주고받은 탓에 군민들은 이들의 경선 싸움을 한심하게 여겼고, 이용우가 경선에서 이기긴 했지만 결국 경선 당시 강용일 충남도의원과 주고받았던 네거티브 싸움은 본선때 낙선 요인으로 작용했다.
19대 대선 때는 문재인이 부여읍과 세도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홍준표에게 졌지만, 부여읍의 인구와 관외투표에서의 몰표로 인해 겨우 0.63%, 269표 차이로 졌다. 이전엔 2:1, 5:3차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가 엄청 심한 셈, 따라서 부여군도 향후 선거 때 경합지역이 될 확률이 높아졌고, 결국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최초의 부여군수가 탄생했다.
한창 행정구역 통합 미끼가 유행할 때 부여군에서 공주시에 '백제시'로 통합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무산된 적이 있다. 여러모로 공주 입장에선 손해인 데다가, 부여에서 공주는 의외로 멀다. 차라리 논산이 가까운데, 문제는 논산, 특히 강경은 차라리 전라도에 편입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을통행료를 요구하며 장의차를 막는 기행을 보인 사건이 있었다. # 이 지역 뿐만 아니라 부여군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골함도 못묻게 막고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 한편 이 J리의 당시 이장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태양광발전소 부지 진입 도로를 틀어막고 최대 1억의 뒷돈을 요구하여, 해당 업자가 결국 사업을 접은 일이 뒤늦게 밝혀졌다. 기사 2017년 10월 J리의 이장이 물러나고 새 이장이 선출되었는데, 새 이장은 전 이장단이 불법으로 받은 통행료 내역을 공개하라며 대자보를 붙인 귀농 부부를 J리에서 제명한 뒤 마을회관 등의 출입금지 조치를 하는 이른바 작은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기사장의차 통행료 요구 사건 문서로.
창천의 백제와 후속작 대해의 백제에서는 동아시아를 완전히 제패하고 이후 알려진 문명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하는 제국이자 대백제국의 2개의 도읍지(나머지 하나는 "한성" 지금의 서울특별시)중 하나로 나오면서 주인공 의자왕 (백제국왕겸 초원의 대칸으로 나옴)덕분에 원래 도읍이다 보니 정쟁의 중심이며 이후 왕비 은고와 왕자들을 남방으로 내쳐 숙청하고 외척 진구도 아프리카로 보내는등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하나 신라를 멸하고 일본을 몇개의 귀족령을 제외하면 직할령으로 삼고 당나라를 멸하고 강남지역을 직할령화 하면서 돌궐의 대칸이되고 고구려를 동생국 또는 아래로 두었으면서 금 은화도 생산하고 세계적으로 가장 큰 도서관(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말기 로마제국후기의 혼란기와 이슬람제국의 점령등으로 파괴되고 복구하다 서서히 입지가 좁아지고 작중 시기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을 두고 주변국으로 인재를 받아들이면서 원래역사보다 더욱 커진 번영하는 거대도시가 된다.
2000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적용되기 전에는 영문 표기를 PUYO로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문으로 이름이 같은 뿌요뿌요를 만든 컴파일의 사장 니이타니 마사미츠가 이를 보고 한국 방문때 부여를 직접 들른 적도 있다고 한다.
바람의나라: 연 광고에서 고구려 군대와 부여 군대가 서로를 놀리는 플롯의 광고를 냈는데, 부여의 군대가 '부여군'으로 표현되면서 이 부여군을 연상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부여군청 반응이 궁금하다' '저도 부여 사람인데 군수님이 이거 봤으면 좋겠다' 이런 댓글들이 나왔다. 심지어 자기가 부여에서 태어났는데 기분 나쁘다며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 2023년 1월 주민등록인구[2] 이 지역의 대표적인 백제 유물 백제금동대향로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다.[3] 이러한 점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과 매우 흡사하다. 평양 역시 313년 미천왕의 수복 이후 고구려령으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시기 이전부터 제2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소도 평양이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기사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평양 역시 427년 장수왕의 천도 이전부터 완성되어있던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4] 이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도 마찬가지이다.[5] 남북국시대의 행정구역은 보통 삼국시대의 행정구역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부여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보인다.[6] 한자만 다르다.[7] 부여읍 초입 로터리부터 군청 앞까지의 도로가 당시 일제가 닦은 신작로.[8] 물론 친일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부여가 개발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나온 대화.[9] 2021년 3월에 딱 3명 차이로 2만 선이 붕괴했다.[10]공주역 자체가 위치가 너무 나쁘다. 교통면이나 거리면으로 논산역이 훨씬 더 편하고 접근성이 좋아서 공주역을 굳이 이용할 이유가 없다.[11] 물론 KTX와 SRT가 다니지만 이용객이 거의 없다.[12] 네이버 블로그 후기를 보면 알수 있다[13] 그와 동시에 롯데리조트와 롯데스카이힐CC도 같이 생겼다.[14] 아울렛에 대부분 옷을 사러 가기에 그나마 지역상권에 문제가 많이가지는 않는다.[괄호] ABC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15] 이 세 학교를 제외하곤 학생수가 많이 적다.[A]김종필 전 총재의 고향[B] 부여읍[C] 규암면, 은산면, 외산면, 내산면, 구룡면, 홍산면, 옥산면, 남면, 충화면, 양화면, 임천면, 장암면, 세도면, 석성면, 초촌면[16] 13.2.28 의원직 상실(선거법 위반)[17] 13.4.24 재보궐선거[18] 이 때 JP는 지역구 선거구가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비례대표 1번으로 나왔음에도 정당 득표율 3%도 못 받은 채 낙선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 충격받은 JP는 그대로 정계 은퇴한다. 여담으로 이 때 JP가 당선되었다면 9선으로 동률이었던 YS를 제치고 한국 국회 역사상 최다선인 10선이 될 수 있었다.[19] 옥산면 J리라고 알려졌는데 옥산면에 J로 시작하는 장소는 중양리 말고는 없다.[20] 지역구 : 대전광역시 대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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